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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드라마

언어의 정원

멀티서퍼 2020. 8. 9. 16:10

언어의 정원

나이보다 조숙한 소년과 나이보다 순진한 여자의 사랑이야기

 

밤새 내린 비도 모자란 듯 지금까지 계속 비가 내립니다.
어릴 적에는 비를 참 좋아해서 비가 오면 설레고, 그래서 빗 속을 걸어 다니곤 했는데, 이제는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비 오면 눅눅하고, 꿉꿉해서 집에 있는 게 좋더라고요^^;
아무튼 비가 내리니, 비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봤을 법한 영화(?) 한편 소개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하지만,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보지 않았습니다.
왠지 좀 지루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고등학생과 선생의 사랑 이야기라고 하니 유치한 느낌도 들어서 당시에는 땡기지가 않더라고요.
이상하게 코미디의 유치함은 괜찮지만, 진지한 얘기를 유치하게 하는 것은 별로더라고요.
그러다 우연히 TV를 통해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줄거리는 이미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다 나온 얘기니까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주인공 타카오는 싱글맘 인 어머니와 직장에 다니는 형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자신들의 일로 바쁘기 때문에 전반적인 가사는 그가 맡아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발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비가 내리는 날이면, 오전 수업을 땡땡이 치고, 일부로 학교로 가는 길 중 정원(공원) 정자에 앉아 신발 스케치를 합니다.
그러다 정원 정자에서 우연히 여주인공 유키노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정원 정자에 앉아 초콜릿에 맥주를 마십니다.
그녀는 그가 다니는 학교 고문선생으로 학생들의 괴롭힘으로 인해 미각 장애를 앓게 되었고, 그래서 알코올과 초콜릿 외에는 아무런 맛도 못 느낍니다.
타카오는 그녀에게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느냐고 묻지만, 그녀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지만 곧 그녀는 그의 교복을 보고 그가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학생이라는 걸 알게 되고, 국어교사 답게 만엽지에 나오는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 의 단가를 낭독합니다.

단가를 제가 번역한 거라 영화 자막가 다를 수 있습니다.

천둥신(천둥소리) , 조금이라도 보이며
흐려져 
비라도 내려주렴
그대가 머무르도록

    -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

           
하지만, 타카오는 그녀가 보낸 신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두 사람은 비 오는 날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정원에서 만나게 되었고, 타카오는 처음으로 자신의 꿈을 그녀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둘은 비라는 매개체와 정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친해집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위안을 받습니다.
그러던 중 장마가 끝났고, 2학기 여름날 우연히 학교에서 스쳐가는 그녀를 보게 된 타카오는 그녀가 고문 교사이고, 3학년 학생들의 괴롭힘으로 인해 퇴직 위기에 몰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그녀를 괴롭힌 배후 인 3학년 여학생 '아이자와'를 찾아가 그녀의 뺨을 한대 때립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아이자와의 남친에게 몇 배로 얻어터집니다.
그렇게 상처투성이가 된 타카오는 정원으로 가고, 거기서 유키오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그녀가 전에 자신에게 읊었던 단가의 답가를 합니다.

 

천둥신(천둥소리), 조금이라도 보여
흐려지지  않아도
나는 머물겠소
그대가 여기에 더 머문다면

 

분명 비가 오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만나서 그런지 천둥이 치더니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집니다. 너무 많은 비가 계속 내려 두 사람은 흠뻑 젖었고, 옷을 말리기 위해 유키오가 사는 집으로 갑니다.
두 사람은 그 집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으며, 행복감을 느낍니다.
내가 뽑은 이 영화의 가장 백미는 두 사람이 식사 후 차를 마시며, 마음속으로 하는 혼잣말입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 중...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

두 사람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째서 이 장면이 가장 명장면이냐고 묻는다면,  
이 영화에서 두 사람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껴진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 어떤 이는 저건 좀 오버 아닌가? 저게 어떻게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지? 이게 말이 돼? 라고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설명을 붙이자면,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두 사람에게는 상황이나 환경 상 애정의 결핍이 있었습니다.
타카오는 가족이 있어도 각자 자기 삶이 바쁘기때문에 혼자라는 느낌이 강했고, 유키오도 혼자 살고 있는 여자인데다가 학생들의 괴롭힘으로 따스함이 그리운 상태였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안락한 공간에서 서로를 향한 따스함을 느낀 순간이었기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라고 느낀 것이죠.
아마 많은 분들도 연애를 해보셔서 알겠지만, 비내리는 날-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음식을 해 먹고, 따뜻한 차를 마신다고 상상해 보세요.
행복하잖아요^^ 물론 연애 초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싱글에서 벗어나 이제 막 커플이 되는 그 순간이라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잖아요.
아무튼 이 부분에서 두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쓸쓸한 인생을 보냈는지가 느껴져서 뭉클했던 장면이었습니다.
그 행복한 기분에 취해 타카오는 고백을 하지만, 유키오는 느닷없이 선생으로 돌변해 현실적으로 대응합니다.
상처 받은 타카오는 옷을 챙겨 입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나가고, 홀로 집에 남은 유키오는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올라 맨발로 그를 잡기 위해 계단을 뛰어 내려갑니다.
마침 아직 가지 않고, 아래층에서 비를 보고 있던 타카오는 뒤늦게 열이 받았는지 솔직하지 못한 그녀를 향해 화를 냅니다.
그의 말을 듣던 그녀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그를 와락 끌어안습니다.
나이보다 조숙한 소년과 나이보다 순진한 여자의 사랑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이 거의 클라이막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뒤는 현실적으로 각자 자기의 삶을 이어가는 부분이 나옵니다.
아무튼 엄청 잔잔한 이야기라 기분이 완전 다운되서 세상 지루한 상태에서 큰 기대를 안 하고 보시면,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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